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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 이야기/情 나눔글

[기사]사자성어, 좀 쉬운 걸로 하면 안되겠습니까?

사자성어, 좀 쉬운 걸로 하면 안되겠습니까?

 

[JES] 광풍제월, 욕속부달, 불광불급….

2008년 새해를 맞아 사회 각계 지도층 인사들의 신년사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 희망찬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새해 화두로 사자성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은 지도층 인사들의 신년사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정규 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은 사람들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난해한 사자성어들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섭 기자 [myth@ilgan.co.kr]



▲도대체 무슨 뜻인지…

교수신문은 대학 교수들이 뽑은 새해 희망의 사자성어로 ‘광풍제월(光風霽月)’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340명의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32%가 ‘광풍제월’을 택했다고 한다. 한글만으로는 도저히 뜻을 알 수 없을 뿐더러 한자를 봐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광풍제월’은 중국 ‘송서’의 주돈이전편에 나오는 말로, 북송의 시인인 황정견이 유학자 주돈이의 인품을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에 비유한 단어다.

이에 대해 대학생 임재호(25)씨는 “해석을 들어도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도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인용해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의아해 했다. 대학원을 나온 자영업자 전수경(37)씨도 “많이 배우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말로 자신의 학식과 지위를 과시한다는 생각도 든다“고 꼬집었다.

▲2000년 전 중국이 21세기 한국으로

지도층 인사들이 사용하는 사자성어는 중국의 고전에서 발췌한 것이 대부분이다. 삼성증권이 올해 증시를 한마디로 표현한 ‘욕속부달(欲速不達)’은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가 제자 자하에게 “빨리 하려고 들면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가르친 데서 비롯됐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신년사에서 밝힌 ‘선우후락(先憂後樂)’은 11세기 북송의 학자인 범중엄의 ‘악양루기’에 나온 말로, ‘(국민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거움은 나중에 누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정대철 대통합민주신당 상임고문이 “작년 패배를 교훈 삼아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며 강조한 ‘전패위공(轉敗爲功)’ 역시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말이다. 1000∼2000년 전 고대 중국의 정치 이념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 당선인도 애용하는 사자성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중국의 고전을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뜻을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기는 엇비슷하다. 이 당선인이 2008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선정한 ‘시화연풍(時和年豊)’은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뜻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임금이 등극할 때나 새해 어전회의 때 여러 차례 등장하는 단어다. 그러나 이 당선인도 1년 전에는 ‘맹자’에 나오는 ‘한천작우(旱天作雨)’를 2007년 사자성어로 꼽은 바 있다.

오 시장은 신년사에서 정민 한양대 교수의 저서 ‘미쳐야 미친다’에 나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을 언급하며 “미친 듯한 열정이 없으면 위대한 성취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새해 단배식에서 사자성어 대신 ‘비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인 ‘해밀’을 시루떡에 새겨 눈길을 끌었다.

▲어려워야 의미를 곱씹는다(?)

교수신문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오리무중(五里霧中), 이합집산(離合集散), 우왕좌왕(右往左往) 등 상대적으로 쉬운 단어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난해한 단어들이 부쩍 늘어났다.

사자성어 선정에 관여하고 있는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오리무중이나 우왕좌왕이니 하는 말은 쉬워서 대번에 와 닿기는 하지만 그냥 한번쯤 웃고 지나가고 마는 정도인데 비해, 어려운 말을 들으면 그래도 한번쯤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효과는 있지 않느냐”라고 설명했다.

중앙 엔터테인먼트&스포츠(J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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