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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작가갤러리/국내작품

[스크랩] 동국진체




고려 말기 이래의 경향으로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안평대군(1418~1453)이 있는데, 안평대군은 조맹부보다도 송설체를 수려하고 곱고 아름답게 구사하여 명(明)에서 조차 당대 제일로 꼽았으며 당시의 예술계에서는 그의 서체를 좇아 이후 송설체가 조선서체로 정착하게 되었다. 문종·성종을 비롯하여 최홍효·강희안(1417~1464)·박팽년(1417~1456)·이개(1417~1456)·성삼문(1418~1456)·서거정(1420~1488)·성임(1421~1484)·박증영(1464~1494)·신공제(1469~1536)·임희재(1472~1504)·김희수(1475~1527)·성세창(1481~1548) 등이 송설체의 대가로 등장하였다.

서예에서는 주자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이해되면서 사림(士林)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자기 서체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자암 김구(1488~1534)가 왕희지체와 거의 비슷한 인수체(仁壽體)를 이룬 것을 시작으로 청송 성수침(1493~1564)·하서 김인후(1510~1560)·퇴계 이황(1501~1570)·우계 성혼(1535~1616)·율곡 이이(1536~1584)·월정 윤근수(1537~1616) 등 대학자들이 뒤를 이어 독특한 자가서체(自家書體)를 확립해 감으로써 송설체의 굴레를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글씨는 송설체의 특징이자 결점인 연미지체(姸媚之體)를 벗어났지만 송설체의 성리학적 규범에 맞도록 근엄 단정하게 변화되어 조선화 되었다.

이렇게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으로 변화되어 여러 문화현상들이 고유색을 나타내는 시대상황 속에서 봉래 양사언(1517~1584)과 석봉 한호(1543~1605)와 같은 대가들이 출현하였는데, 이들의 서체는 송설체를 바탕으로 하면서 우리 고유의 예술감각인 강경명정성(剛硬明正性)을 첨가하여 근엄·단정·강경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서체였다. 그래서 한석봉의 글씨는 명의 감식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특징은 조선성리학이 요구하던 서체였으므로 선조의 어필체(御筆體)가 되었고 왕실과 사대부 계층에서 따라 쓰게 되어,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석봉체는 전 조선을 석권하게 되었으며, 송설체는 청평위 심익현(1641~1683)·해창위 오태주(1668~1716)와 같은 왕실과 왕의 인척을 중심으로 남아 있다가 사라지게 되었다.



안평대군 이용의 글씨로 추정되는 작품
'사한소황후'란 '문학과 서화란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 이후의 일이다'는 뜻이다.
즉 송(宋)나라의 대가인 소동파와 황산곡이 비로소 문학과 서화의 세계를 열었다는 칭송의 글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당대의 명필로 많은 글씨를 남겼으나 형인 수양대군(세조)이 집권하면서 반역죄로 몰려 죽는 바람에 그의 작품도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이후 동국진풍(東國眞風)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사조는 서예에도 영향을 미쳐 제일 먼저 양송체(兩宋體)와 미수체(眉·體)를 출현시켰다. 양송(兩宋)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은 우암 송시열(1607~1689)와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웅대하고 힘차며 장엄하고 정중한 무게를 더하고 있다.
한편, 탈주자학파인 미수 허목(1595~1682)은 주자 이전의 유학을 지향한 것처럼 서법(書法) 또한 삼대(三代) 문자로의 복고를 신념으로 하여 진위를 가리지 않고 고전체(古篆體)의 특징을 취하여 기이하고 옛스러운 서체를 이룩하였다. 허목의 서체는 그에게 배운 옥동 이서(1662~1723)에게 영향을 미친 듯한데, 이서는 「필결」을 지어 조선서예사상 최초로 서론(書論)을 남긴 서예이론가로서 그의 서예이론은 서(書)의 본질을 철저하게 『주역(周易)』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서의 서체를 세상에서는 동국진체라 불렀는데 이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1668~1715)에게 전해졌고 다시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해졌는데, 윤순은 이론적으로는 이서의 왕희지 유일주의의 논리를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를 정비하고 서체 자체도 김생(711~791) 이래 우리나라의 대가들의 서체를 소화하여 왕희지체로 절충·흡수함으로써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광사의 글씨 해남 대흥사 현판
추사는 귀양길에 여길 들려 이 현판을 떼고 자기 글씨의 현판을 달았다가 9년후 유배서 풀려 돌아 가는 길에 다시 이현판으로 바꿔 놓았다. 사실 추사체의 완성이 그의 제주 유배 시절 이루어 졌다고 볼 때 이해가 가는 일이다.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의 제자인 원교 이광사(1705~1777)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는데, 위부인(衛夫人)과 왕희지의 글로 되어있는 「필진도(筆陣圖)」를 기본으로 삼고 옥동 이서의 「필결」을 본받아 훨씬 더 방대한 체제를 갖춘 「원교필결」전후 양편을 지어 동국진체의 이론적 체계를 발전적으로 정비하였다.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창암 이삼만(1770~1847)이 함께 쓴 비문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삼암마을 뒷산에 세워진 김양성(1754~1832)의 묘비 전면은 추사의 글씨(사진 오른쪽)로, 양 측면과 후면은 창암 글씨(왼쪽)로 각각 쓰여져 있다.
이 비석은 전주 남고산성 대장인 남고진별장 등을 지낸 무인 김씨가 죽자 자손들이 세운 것이다.
추사는 유배길에 이삼만을 만났으나 그의 글씨를 높게 평가하지 않아 (아마 무시 한듯)
그의 제자들의 분노와 원성을 샀다.그러나 후일 추사가 해배길에 사과 했다.
이역시 제주에서 쌓은 내공 때문일듯








이에 뒤이어 표암 강세황(1712~1791) 같이 북학을 이해하는 학자들이 이광사 서론(書論)의 근거가 되는 「필진도(筆陣圖)」를 부정하여 동국진체에 대해 전면적인 부정을 하였다. 이 이후 북학파의 서체는 동국진체를 탈피하여 구양순체나 동기창체를 귀의처로 삼아 무징불신(無徵不信)의 고증적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어서 추사 김정희(1786~1856)는 한예(漢隸)에 바탕을 두고 여러 필체의 특별히 뛰어난 장점을 겸비한 추사체를 이루어내었는데, 이는 중국의 청조고증학의 대가인 옹방강(1733~1818) 일파가 이상으로 하면서 이루어내지 못한 서예사상 이상적인 경지였다. 이러한 추사체는 중국 서예계에도 충격을 주어 추사보다 어린 중국 서예가들이 다투어 이를 추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자하 신위(1769~1845)·눌인 조광진(1772~1840)·이재 권돈인(1783~1859)·이당 조면호(1803~1887)·위당 신헌(1810~1888)·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등 명문 출신들과 이상적(1804~1865)·오경석(1831~1879)·김준석(1831~1915) 등 중인인 헌역관(漢譯官)들이 추사일파 이다.  <석산 강창화님 자료에서>
출처 : 인천서구문화예술인회
글쓴이 : 회장(東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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