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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 이야기/문화탐방기

부여 국립박물관 특별전을 다녀와서.....

먼저 제가 찍어 온 사진들입니다.

복제품(부여융묘지석)도 있습니다.

사리함 아래 내용들은 기사들을 옮겨보았습니다.

 

 

 

 

 

 

 

 이하는 기사를 편집한 내용을 옮겨온 것입니다.

2007년 10월 부여 왕흥사터에서 글자가 새겨진 청동사리함이 발견되어 세간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왕흥사터는 사비성泗 ? 城에서 서북쪽으로 백마강을 건너 약 1km 거리에 위치하며 백제 국가사찰로 알려져 있다. 

백제 왕흥사터 출토유물 중 특히 청동사리함에는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이라는 29자의 명문이 있다. 이는 “577년 2월 15일, 백제왕인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혹은 刹柱)을 세웠다. 이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기한 조화로 셋이 되었다.”로 풀이할 수 있는데, 즉 577년에 이 사찰 혹은 찰주를 세웠으며 죽은 왕자를 위한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이 절이 600년에 창건되었다거나 634년에 낙성落成되었다고 전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과도 다른 새로운 사실이다. 이를 통해 이 방면의 백제 역사를 재구성해야 할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뜨거운 관심에 속히 답하고자 발굴유물 속보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리함을 비롯한 각종 금속품, 옥류, 도자, 기와류 등 약 백 여 점의 문화재가 일거에 공개되었다. 사리함에 이어 돋보이는 것은 단연 국내에서 처음 출토된, 운모로 만든 꽃모양장식이다. 이는 출토된 철제테와 함께 왕자가 착용했던 관모의 장식으로 추정되어, 향후 백제 복식은 물론 관제冠制 연구를 위한 중요자료로 평가된다. 한편, 쌀알보다도 작은 유리에 구멍을 뚫거나 손톱만한 금공품에 펼쳐진 정밀한 세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들 금공품과 옥 등 세공품이 포함된 사리공양구, 그리고 기와류 등의 전시유물은 6세기 고대동아시아 세계에서 국제적이고 개방적이었던 대도시 왕경 사비[부여]의 화려한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위덕왕>

백제의 제27대 왕(554~598 재위).
이름은 창(昌). 성왕의 맏아들이다. 538년(성왕 16) 사비(泗沘 : 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긴 백제는 중흥의 발판을 다지고 있었다. 551년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의 6군(郡)을 되찾았으나 곧 신라군의 공격으로 다시 빼앗겼다. 백제는 그 보복으로 554년에 왕자 창을 보내 신라의 관산성(管山城 : 지금의 옥천)을 공격했고, 성왕은 뒤이어 출전했다. 처음에는 백제군이 유리했으나 신라의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의 역습을 받아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 싸움에서 성왕은 전사하고, 백제는 좌평(佐平) 4명과 3만 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는 참패를 당했다. 그뒤 창이 즉위하여 위덕왕이 되었다.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따르면 위덕왕은 그 충격으로 아버지를 위해 출가하여 불도를 닦고자 했다고 한다. 561, 580년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했으나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배했고, 그뒤 시종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말기에 와서야 국력을 회복했다. 관산성전투의 패전으로 성왕 때 계속된 왕권강화 노력은 중단되었으며 위덕왕 때는 대성(大姓) 8족(族)이 발호하여 왕권이 위축되었다. 왕은 이를 대외적으로 만회하기 위해 북제(北齊)·진(陳)·북주(北周) 등에 빈번히 사신을 보냈다. 이는 신라·고구려와 대립하는 가운데 국제적 고립을 면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한편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축하사절을 보냈고, 598년에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건의하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삼국사기 27권 백제본기 27.위덕왕 >

제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  재위기간 44년>

위덕왕은 이름이 창이니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붕어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원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6년, 여름 5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8년, 가을 7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다.

19년,가을 9월 초하루 경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24년, 겨울 10월, 신라 서부 변경의 주, 군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의 이찬 세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격파시켰다.

26년, 겨울 10월, 혜성이 하늘에 뻗었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지진이 발생하였다.

36년, 수 나라가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 전함 한 척이 탐모라국으로 표류하여 왔다. 그 배가 돌아가게 되어 국경을 통과할 때, 왕이 물자를 풍성하게 주어 귀국케 하고, 사신을 보내 진 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렸다. 수 나라 고조가 이를 훌륭히 여겨 조서를 내려 말했다.

"백제왕이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는 말을 듣자 멀리서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쳤다. 왕래가 지극히 어려운 지역이니, 만약 풍랑이라도 만나면 사람이 상하고 재물을 잃게 될 것이다. 백제왕의 마음이 순박하고 지극한 것은 내가 이미 깊이 알고 있다. 거리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얼굴을 대하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하필 자주 사신을 보내어 서로 대면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하지 말 것이며 나도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그리 알 것이다."

39년, 가을 7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41년, 겨울 11월 계미에 혜성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45년, 가을 9월, 왕은 수 나라가 요동 전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군사의 향도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우리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일을 모두 알고 군사를 보내 우리 국경을 침략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붕어하였다. 군신들이 의논하여 시호를 위덕이라 하였다.

 

위덕왕 - 27대  

위덕왕(威德王)의 이름은 창(昌)이며 성왕의 맏아들이다. 554년 성왕 이하 3만 명의 군사가 전몰한 관산성 패전 이후, 백제는 그 영향권에 있던 가야연맹이 신라에 잠식되는 것을 방관할 정도로, 그 국력은 뚜렷한 약화의 조짐을 보였던 것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신라와의 전쟁을 주도하다가 패전한 관계로 위덕왕의 왕권은 취약했던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관산성 패전 2개월 후 백제는 보복전을 단행하여 신라의 진성(珍城)을 공격하였다. 백제는 주민 3만9천여 명과 말 8천 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고구려가 웅천성을 침공해왔으나 백제는 이를 잘 막아냈다. 이 승전은 백제의 체면을 어느 정도는 세워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위덕왕 자신으로서도 귀족세력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독립을 할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었을 것이다.

위덕왕은 고구려와 신라와의 계속되는 전쟁에 대해 외교로서 활로를 찾으려고 하였다. 남조의 진(陣)과 북조의 북제(北齊), 그리고 북주(北周)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북주를 이어 수(隨)가 세워지자 기민하게 사신을 보내면서도 남조의 진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수나라가 진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축하 사절을 파견하는 등 전형적인 등거리 외교를 구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백제는 수나라가 고구려의 요동을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알렸다. 고구려가 이 소식을 듣고는 격분하여 군대를 출병시켜 백제의 변경을 공격해왔다.

위덕왕 말년인 598년 신라의 한수유역 점령에도 불구하고, 교통로를 따라 기습전을 시도한 고구려군의 돌연한 백제 침공으로 인해 백제 내부에 상당한 동요를 불렀을 것으로 추측한다. 26대 위덕왕(威德王) 1년(AD554) 이름은 창(昌)이며 성왕의 원자이다. 고구려가 웅천성을 침공하였으나 패하였다. 24년(AD577) 10월 신라 서변을 침공하였으나 신라 이찬(伊 ) 세종(世宗)에게 패하였다. 45년 수(隨)가 고구려를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의 길잡이를 자처하였다. 이 사실을 고구려가 알고 번번이 국경을 침략하였다. 12월 왕이 승하하였다.

 

<위덕왕(威德王)>

위덕왕(威德王)1525(성왕 3)∼598(위덕왕 45). 백제 제27대왕으로 554년붜터 598년까지 백체를 통치했다. 성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창(昌)이라 한다. 태자 때 성왕을 도와 신라에 대한 정토(征討)에 앞장섰다.
당시 성왕은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군을 중심으로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구성된 북진군을 일으켜 고구려공격에 나섰다. 그 결과 백제는 475년(문주왕 1)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하류의 6군(郡)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맹국인 신라가 백제를 배반하고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뒤 무력으로 한강하류 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성왕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을 꾀하였다.
이때 백제의 조정에서는 신라정토를 반대하는 귀족세력이 있었지만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정토군을 일으키는 데 적극적인 소임을 한 사람이 바로 태자 창이었다. 신라정토군의 선봉에 나선 창은 마침내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백제는 성왕과 4명의 좌평(佐平)을 비롯하여 3만명에 가까운 사졸이 전사하였다. 성왕의 전사로 태자 창은 왕위에 올라 위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관산성 패전에 대한 귀족들의 책임추궁으로 정치적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반면에 귀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증대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정치체제는 이전의 왕권중심체제에서 점차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위 후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신라와 고구려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여 온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98년(위덕왕 45)에 수나라가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자진하여 군도(軍導)가 되기를 청하는 등 고구려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리고 신라에 대하여서도 관산성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빈번히 국경을 침범하였다.
반면에, 중국의 남북조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적 고립을 면함과 동시에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북제(北齊)로부터 570년에는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使持節侍中 車騎大將軍 帶方郡公百濟王)에 책봉되고, 571년에는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使持節 都督 東靑州諸軍事 東靑州刺史)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경축사절을 보냈고, 또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충동하기도 하였다.
 

2007년 11월 1일 (목) 03:51   서울신문

<“왕흥사 목탑, 위덕왕이 세 왕자 위해 세운것”>


[서울신문]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최근 출토된 백제시대 사리장엄에 새겨진 명문에서 그동안 ‘망(亡)’자로 읽혀졌던 글자는 ‘삼(三)’자의 이체자(異體字)로 밝혀졌다.

‘망(亡)왕자’가 아니라 ‘삼(三)왕자’라면, 백제 위덕왕(554∼598)은 죽은 세 왕자를 위하여 577년 왕흥사에 목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것이 된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亡’자처럼 보이는 글자는 ‘三’의 이체자로 중국 제나라의 방주타 무덤에서도 ‘三’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31일 밝혔다.

이 교수는 “‘망왕자’로 판독하면 세상을 떠난 왕자가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면 ‘망왕자 누구누구’라는 식으로 이름을 쓰거나, 몇째 왕자로 언급했어야 했다.”면서 “문맥상으로도 ‘삼왕자’로 판독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이체자란 뜻과 음은 정자와 같으나 형태가 다른 글자를 말한다. 왕흥사 사리장엄의 동제 사리호에 새겨진 ‘삼’자는 정자 ‘三’의 중간획과 아래획의 왼쪽 상하로 획을 하나 더 파놓은 모습이다. 왕흥사 명문에는 三을 비롯해 立(입)·刹(찰)·本(본)·葬(장)·神(신) 등이 이체자이다.

이 교수는 “세 왕자가 모두 고인이 된 시대적 배경을 찾는 일이 긴요하다.”면서 “‘위덕왕 8년(561년)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공했으나 패하여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위덕왕 24년(577년)에는 신라 서변을 침공하다가 3700여명이 전사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백제와 신라의 577년 전투는 10월의 일로, 목탑이 건립된 577년 2월15일보다 오히려 늦지만, 신라측 사료에서 나온 기록인 만큼 신라 기년에 따르면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개토왕릉비문’에서 확인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은 ‘삼국사기’ 기록보다 1년 앞선 391년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이렇듯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전몰한 왕자의 숫자가 3명에 이르렀던 것 같다.”면서 “위덕왕의 뒤를 아들이 아닌 아우인 혜왕이, 그것도 70세 안팎의 고령에 계승한 것은 아들들이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아들인 위덕왕도 전쟁을 몸소 치렀듯이 왕실이 왕자들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쟁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왕자들이 잇따라 전사했고,‘亡’자와 닮은 이체자로 사망한 왕자들을 위해 목탑을 세운다는 의식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의 존재 또한 “당시는 왕의 동생도 왕자라고 표기한 만큼 위덕왕의 아들이기보다는 아우일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 교수는 “경주 ‘황룡사찰주본기’에 나오는 刹柱(찰주)가 ‘탑기둥’을 뜻하는 것 처럼, 왕흥사 명문에 나오는 立刹(입찰)도 ‘절을 세우다.’가 아니라 ‘탑을 세우다.’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면서 “따라서 왕흥사는 ‘삼국사기’ 기록대로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634년(무왕 35년) 낙성되었다는 데 아무런 변동이 없다.”고 덧붙였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사리기 봉안은 왕권 위한 이벤트였나>

국내 최고 청동 사리함으로 떠들썩하게 발굴된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사리알 존재에 의견만 분분

▣ 글·사진 부여=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병에 넣은 부처의 사리(화장한 유골) 세 알은 어디로 갔는가?

백제 27대 임금 위덕왕이 1400여 년 전인 577년 먼저 이승을 떠난 아들을 위해 사리 세 알을 넣어 바쳤다고 한문 글씨로 새긴 국내 최고의 청동 사리함과 금은제 사리병은 물음 앞에서 침묵할 뿐이다. 지난해 10월 초 백제 도읍지였던 충남 부여(사비) 왕흥사 목탑터 땅속 기둥돌 구멍에서 생생하게 발굴(<한겨레21> 683호)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유물의 가장 흥미로운 수수께끼는 영영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짙어졌다. 유물을 발굴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월29일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부여 왕흥사지출토 사리기의 의미’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문화재 전문가들과 이 의문에 대한 논의를 거듭했다. 하지만 학문적 차원에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결론만 확인했다. 연구소 쪽은 발굴 당시 사리함과 사리병을 분석한 결과 한 알의 사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 왕흥사 목탑터에서 출토된 사리기 갖춤. 맨 뒤쪽의 제일 큰 용기가 청동사리함이며 그 앞의 두 번째로 큰 항아리가 은제호, 오른쪽 제일 작은 용기가 금제병이다. 금제병이 들어간 은제호가 사리함에 담기는 얼개인데, 정작 사리알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후대에 누가 꺼냈다? 아예 안 넣었다?

이날 자리에 토론자로 나온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불교미술사 전공)이 먼저 이 문제를 치고 나왔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명문을 보면) 백제 임금인 위덕왕이 나라의 큰 절(국찰)에 부처가 열반한 날짜인 2월15일을 골라 사리함을 봉안했다고 나온다. 게다가 사리병에 원래 2매를 넣어 모시려고 했는데, 신의 조화로 저절로 셋이 되었다는 구절까지 나온다. 이렇게 국가적 의미가 중대하고, 신묘한 영험을 내보인 사리가 한 알도 안 나온 발굴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는 “합리적으로 보면, 아예 처음부터 넣지 않았거나, 어느 때에 사리만 살짝 꺼냈다는 것밖에 답이 없다”며 “그런데 (공개된) 발굴조사 결과에는 이들 사리함과 사리병은 1400여 년전 넣은 뒤로 한번도 꺼내거나 다시 봉안한 흔적이 없어 보인다기에 더욱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목탑터 땅 표면과 그 아래 땅속에 묻힌, 사리 구멍 있는 기둥받침돌(심초석) 사이 구간에 흙을 되메우고 다진 흔적이 확인됐다는 사실을 이런 맥락에서 문제 삼았다. 앞서 목탑터 사리용기 갖춤에 대해 발표한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학예관이 심초석은 땅 위에 있고, 지하의 돌은 사리를 넣기 위해서만 설치한 시설이라는 가설을 꺼냈기 때문이다. 강 소장은 이 가설을 겨냥해 사리를 보관했던 지하의 돌 위를 메우고 다진 흙이 손을 타지 않았다는 데 의문을 표시하는 발굴전공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후대에 누군가가 흙을 파내고 사리를 꺼내갔을 개연성을 암시한 셈이다.

이에 대해 김 학예관은 “만약 땅속에서 사리를 꺼내갔다면, 사리기도 같이 꺼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아예 넣지 않았거나 유기물인 사리가 땅속에서 녹아 사라질 수도 있지만, 현재 사리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어 각자의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발굴 당시 사리가 오랜 세월 사리병의 산성 수분 속에 녹은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소의 조사 결과 사리를 입증할 만한 어떤 물질도 사리갖춤에서 검출되지 않았다. 김용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발굴 뒤 사리병 안을 가득 채운 물을 분석한 결과 이슬이 맺히는 결로 현상으로 생긴 물이었고, 특정 유기물이 많이 녹은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조사단은 금제 사리병과 이를 싼 은제 사리병 사이 공간에서 미세한 구슬 모양 알맹이도 발견해 분석했으나, 사리와는 관계없는 금속성 물질로 드러났다. 또 사리 수가 신묘한 조화로 바친 것보다 더 늘어났다는 영험 현상은 중국 등지의 사리기 기록에도 간간이 나오는 것으로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종교적 신념의 영역이라는 게 미술사학계의 일반적 인식이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 왕권 강화책의 하나로 사리는 넣지 않고, 왕의 권위를 과시하는 이벤트로서 사리기 봉안 행사를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 세계에서 유일한 연꽃 모양의 투명 운모장식. 왕흥사 발굴유물을 대표하는 국보급 명품으로 꽃잎 사이에 금박을 넣어 화려함을 더했다. 천으로 만든 관모(모자) 정면에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모의 주인공은 죽은 왕자일 것이란 견해가 유력하다.

8천여 점의 귀금속·유리 공예품에 감탄

사리의 행방에 대한 호기심은 풀리지 않았지만, 학술대회에서는 사리함과 함께 바친 보석, 장신구 같은 고급 공예품에 대한 색다른 분석 성과들도 적잖이 나왔다. 우선 학계를 놀라게 한 것은 청동 사리함에 있는 문제의 명문을 새긴 방식이었다. 얼핏 상식대로 끌 등으로 여러 번 쫀 것이 아니라 ‘도자’라 불리는 옛 필기용 칼을 펜이나 붓처럼 놀려 쓴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서예사 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는 청동사리함 명문의 서체를 분석한 논고에서 이런 분석 결과를 내고, “사리함 명문은 도자를 써서 한 번 붓질로 한 획을 완성하듯이 쓴 것”이며 “목간의 글씨처럼 여러 차례 칼을 놀려 깎아낸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런 필기 방식이 경이로운 것은 사리함의 재질인 청동이 돌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가는 정이나 끌로 쪼아도 원하는 모양이나 글자를 내기가 힘든데, 얇은 칼날을 꾹꾹 눌러 당시 중국 남북조의 예서·해서 글씨체를 조화시키고 토속적 멋까지 가미했다는 것이다. 공예사 전공자인 주경미 박사는 “칼로 눌러서 단단한 재질에 글씨를 써야 하므로 손과 팔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야 하며, 재질에 대한 이해와 조형적 감각은 물론 서예도 어느 정도 섭렵해야 이런 명문 글씨가 가능하다”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리함이 나온 지하의 기둥돌 석재 부근에서 8천여 점이나 쏟아져나온 각양각색의 화려한 귀금속, 유리 공예품들 또한 ‘하이테크’ ‘하이컬처’의 칭호를 백제 공예문화에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관모에 붙이는 철제테에 부착된 것으로 추정되는 투명 운모로 만든 연꽃 장식물은 잎 모양 사이에 금박을 겹쳐 만든 것으로, 그 환상적 아름다움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고의 명품으로 칭송받는다. 또 쌀알보다 작은 구슬에 샤프심 지름보다 약간 작은 구멍을 뚫은 유리구슬·목걸이 등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초정밀 세공술을 보여주는 실례다. 이런 내용의 목탑터 일괄유물의 성격과 의의를 발표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 이상의 정교한 안목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목탑터 공예품들은 한-중 사이에 제작지 논란이 일고 있는 금동대향로의 경우도 백제가 충분히 제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는 분석했다. 목탑 사리기 주변에서 나온 이 공예품들이 사리신앙 행사에 따른 것인 만큼 땅신을 달래는 예물인 지진구가 아니라 부처에 바치는 공양물이란 데도 참석자들은 대개 견해를 같이했다.

발굴 좀더 진행된 뒤로 결론 미뤄

한편 목탑의 주기둥돌이 사리기가 나온 지하 석재인지, 지상의 다른 돌인지를 둘러싼 논란과 <삼국사기> 600년 창건 기록과 다른 사리기 명문의 창건연대를 둘러싼 입씨름도 벌어졌지만, 결론은 발굴이 좀더 진행된 뒤로 미루자는 분위기로 돌아갔다. 행사 말미에는 근거가 미흡한 목탑의 3층탑 복원론이 나오는가 하면, 지자체의 사찰터 정비복원 방안 등에 대한 제안이 ‘뜬금없이’ 제기되어 참석자들을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다.

왕흥사터의 발굴 유물들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4월20일까지·041-833-0305)에서 특별전시 중이다. 금·은·동 사리기 갖춤을 비롯해, 운모연꽃 장식과 귀고리 등 공양물로 추정되는 갖가지 공예품들이 보존 처리를 마치고 선보이고 있다.

 

<1400년 견딘 사리함의 비밀>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1400여 년 전 사리함, 명문과 유적들이 논란거리 던져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400여 년 전 비명에 간 백제 왕자의 추모용 사리(부처, 성자의 주검을 화장한 뒤 나오는 구슬 모양 유골 조각)함이 후대 역사를 뒤흔들고 있다. 백제 27대 위덕왕이 즐겨 찾던 사비 도읍(충남 부여) 왕흥사 절터의 목탑터 심초석 밑에서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한자 글씨가 새겨진 사리함과 그 안의 금은 사리병, 그리고 이들을 땅에 묻을 때 액운 없기를 빌며 같이 묻은 진단구 장식들이 지난주 세상에 다시 나왔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6세기 백제 유일의 사리장엄구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8차례 발굴 끝에 찾아낸 것이다. 이들 유물은 흙층 속에서 도굴의 손길을 타지 않고 1400여 년을 견뎠다. 생생한 보존 상태와 예상 밖의 이른 연대 때문에 도굴되어 돌아다녔다면 모두 가짜 판정을 받았을 것이란 말까지 나왔다.



△부여 왕흥사 목탑터에서 나온 6세기 백제 사리장엄 용기. 맨 오른쪽 용기가 명문이 새겨진 청동 사리함. 보주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뚜껑으로 덮였다. 이 함 안에 중앙의 은제 사리병이 외병으로 들어갔고, 이 병 안에 다시 맨 왼쪽의 금제 사리병(내병)이 들어 있었다. 글씨는 사리함의 명문.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서릿발처럼 준엄하고 단순한 원통형 청동 사리함과 내부의 귀금속 사리병, 고졸한 함의 명문 29자, 정교함과 다채로움을 겸비한 진단구 유물들은 사료가 부실한 백제학계에 단비를 뿌렸으나 풀어야 할 수수께끼 또한 한 무더기다.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이번 발굴이 남긴 수수께끼들을 추려보았다.

명문과 <삼국사기>의 내용 달라

왕흥사터 사리함 명문은 국내 최고의 역사서로, 역사 편년에 관한 한 무오류의 정전으로 통했던 <삼국사기>의 정확성 논란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 왕흥사 창건 연대에 대한 사기의 기록이 사리함 명문의 기록보다 23년이나 뒤처지기 때문이다. 명문에는 ‘정유년(577) 2월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고 음각한 한자로 새겼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5권’은 위덕왕의 다음 임금인 법왕 2년(600) 정월에 왕흥사를 창립해 그 다음 왕인 무왕 35년인 634년 2월 준공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문이 거짓을 쓸 수 없으니 사서 기록이 잘못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발굴품 명문의 연대가 <삼국사기> 기록과 엇갈린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학계에선 사서가 완전히 틀렸다는 단정론, 탑만 일단 세운 것을 절을 세운 것으로 명문이 해석했다는 견해 등이 나온다. 사서에 언급된 왕흥사보다 선행하는 형식의 건물이 있었고, 그게 후대 법왕 때 왕흥사란 절로 낙성됐다는 주장이다. 명문 가운데 ‘입찰본사리이매장시’(立刹本舍利二枚葬時), 곧 사찰을 세우고 본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라고 해석되는 대목은 논쟁적이다. 이런 행위만으로 절을 건립한 것으로 볼 것인지, 절을 지을 때 탑을 먼저 세운 뒤 나머지 금당, 강당들을 잇따라 세운 것을 절을 세운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찰이 탑, 금당, 강당을 한 짝에 갖춰야 온전한 절의 건립으로 고대인들이 간주했는지를 따져보는, 간단치 않은 문제다. 고대사 연구자인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사찰을 만든 시기, 세운 이유와 주체도 사리기 명문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각각 달라 격론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하지만 사서가 무조건 틀렸다고 단언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학예관도 “<삼국사기>의 왕흥사 건립 연대가 완전히 틀린 것으로 확인되면 <삼국사기> 기년의 신빙성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며 “결론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문화재청 쪽은 이와 관련해 연말까지 임시 특별전과 중국, 일본 쪽 학자들을 초청한 국제 학술대회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 백제 위덕왕의 원찰로 드러난 부여 규암면의 왕흥사터 발굴 복원도. 백마강변에 있는 선착장과 어도를 통해 곧장 1탑1금당 양식의 절 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라진 사리, 놀라운 마이크로 미학

백제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황금 사리병 안에는 사리가 없고, 맑은 물만 고여 있었다. 후대에 사리기를 손댄 흔적이 전혀 없어 사리의 행방을 놓고도 말들이 많다. 김용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사리기에 사리가 없는 경우는 꽤 된다. 부식된 구멍으로 사리알이 빠져나가거나 외부의 압력이나 화학작용에 의해 녹거나 사라지는 경우도 가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공예사 연구자인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학예관은 “단단한 사리는 고온의 화장을 견뎌 생긴 것으로 물에 녹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리병 뚜껑 덮개의 긴 틈 등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추측했다. 황금 사리병을 싼 은 사리병 속에서 작은 알갱이 한 개가 발견된 것을 학계는 주시하고 있다. 연구소 쪽은 사리병 속 물과 은병에서 나온 알갱이의 성분분석을 벌이기로 했다.

사리구를 묻은 심초석 남쪽 땅속에서 쏟아져나온 수천 점의 장신구, 장식물 등의 진단구들은 당시 동아시아 문명권을 대표하는 초정밀 미세공예품들이다. 목걸이, 귀고리, 장식 버클, 관대 등 백제 귀족들이 평소 썼을 법한 장신구들이다. 투명한 운모를 미세하게 다듬어 연꽃 모양을 만들고 금줄까지 두른 미세 장식, 작은 고리들을 여러 개 이어붙여 마치 축구공처럼 만든 구체 액세서리 장식물들은 디자인, 기법의 독창성 측면에서 전례가 거의 없는 최고 명품이다. 고대 장신구를 연구해온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고리를 이어붙인 금동구체 장식물의 경우 중간중간 연결된 접점에 1㎜ 정도에 불과한 금속 알갱이들을 붙이는 마감 방식까지 사용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정밀 광학기기도 없던 시절, 백제의 장인들은 어떻게 상상을 초월하는 마이크로 미학을 실현했을까. 이 교수는 “6세기 초 무령왕릉의 공예품보다 더 뛰어난 기술력과 조형 수준을 보여준다. 금동대향로를 만들었던 6세기 중엽의 능산리 사찰 건립 시기를 지나면서 전체적으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정비된 상황에서 이런 제작 양상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작은 금고리를 무수히 이어 만든 공 모양 금동 장식물과 투명한 운모로 만든 미세한 연꽃 장식물. 당시 동아시아 미세 공예미술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지고의 명품들이다.

임금의 직통 참배로가 60m 넘어

백마강 어귀의 왕흥사터 발굴은 백제 왕실이 자주 찾은 이른바 강변 가람의 특이한 얼개를 처음 드러냈다. 폭이 13m에, 길이만 60m가 넘는 장대한 어도(임금이 다니는 참배로)가 절터 정문 바깥 축대에서 확인된 것이다. 진입로와 목탑 금당이 일직선을 이룬 특유의 가람에 왕이 배를 타고 그 앞 어도로 들어와 곧장 진입할 수 있는 얼개인 셈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 등이 백마강을 건너 왕흥사에 수시로 행차해 향을 피우고 참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고학자인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일당일탑 가람지 바로 앞에 선착장에서 오는 참배길이 직통으로 이어진 구조는 중국, 일본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왜 물가 근처에 진입로를 두고 원찰가람을 배치했는지 그 배경을 밝히는 것도 흥미진진한 탐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왕흥사지에서 남쪽 어도의 아랫부분은 선착장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행차에 쓰였던 배의 파편이나 선착장 시설의 발굴이 기대되고 있다. 백제 왕실은 왜 강변 선착장에서 절까지 직통 참배로를 대는 원찰을 꾸렸을까. 위덕왕이 왕흥사터에 남긴 유물과 유적들은 새 논란거리를 던지면서 백제 문화사의 장막을 조금씩 걷어내리고 있다.

 

<왕흥사탑 사리기 ‘3대 의문’ 푼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오늘 국제학술대회 개최
목탑 건립시기·동북아 교류·백제 공예수준 논의
  • ◇청동제 사리함의 명문◇진묘수형 패식◇운모 장식◇금실◇금제 귀걸이(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
    지난해 10월 발굴·공개된 충남 부여 왕흥사터 사리기는 세 가지 측면에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원통형 청동제사리함에 새겨진 명문 29자 등을 통한 왕흥사 목탑의 건립 시기와 목적, 사리 안치시설과 사리용기 배치 방식을 둘러싼 중국·일본과의 문화 교류, 운모장식 등 각종 공양품을 통해 본 백제 예술의 우수성 등이 그것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9일 국립부여박물관 강당에서 왕흥사 목탑터 발굴의 백제사·건축사적 의미를 살펴보고 향후 복원 정비 문제까지 다루는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발굴 초기 ‘백제왕 창(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다’라고 해석된 명문 ‘百濟王昌爲亡王子/ 立刹’을 ‘백제왕 창이 세 왕자를 위해 탑을 세웠다’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입찰(立刹)에서 ‘찰’은 ‘탑기둥’을 뜻하는 황룡사 찰주(刹柱)본기처럼 ‘탑’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면서 “또한 ‘망왕자’(亡王子)’의 ‘망’자는 ‘三(삼)’자의 이체자(뜻과 음은 같지만 형태가 다른 글자)로 이는 중국 제나라의 방주타 묘지에서도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불교미술사를 전공한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원통형 청동제 사리외합과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의 3중 구조로 된 사리기 중 청동제 사리함은 중국에 전래된 인도식 사리용기를 원형으로 삼아 6세기쯤 백제에서 특별히 제작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연수 과장은 “국내 처음 확인된 금제 사리병은 그 이후 사리병 역할을 했던 유리용기 기술이 도입되지 않아 과도기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왕흥사 목탑 기단의 구축 방식과 사리기 안치 형식은 동아시아 관점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일본 도후쿠대학의 사가와 마사토시 교수는 “심초석이 지하에 위치하고 사리장엄구로서의 기능이 중시된 공양품 구성 등은 6세기 말∼7세기 일본 목탑과 매우 유사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양홍 연구원은 “심초석에 사리공을 마련하고 지붕 모양의 돌 뚜껑을 덮은 것은 북조∼수나라 때 보이는 사리석함이 이미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사리기와 함께 출토된 운모장식과 철제테, 금제귀걸이, 금실 등 공양품들은 매납된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비시기 백제 문물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단언했다. 이 교수는 “수준 높은 백제 금속공예기술의 우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양품은 중국 유래설 등 부여 능산리 백제금동대향로를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명쾌한 자료”라고 덧붙였다.

    송민섭 기자

 

 

왕흥사터 사리장엄구

-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찾아낸 백제 사리 장엄구 일습. 맨 오른쪽 금동(청동) 사리함에 은으로 만든 사리병(가운데)이 들어 있고, 은 사리병 안에 맨 왼쪽 금 사리병이 들어 있는 삼중 구조입니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남 부여의 백제 왕흥사 터에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기(舍利器)가 나왔습니다. 백제 때 사리기 일습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 왕흥사 터 사리장엄구. 사진출처: 조선일보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들어 있었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높이 10.3㎝, 폭 7.9㎝)에 담긴 채로 출토됐습니다. 하지만 세 겹의 사리기 안에서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금동 사리함은 두들겨 만든 것으로 보이는 몸통과 보주형 손잡이가 납땜된 뚜껑으로 돼 있으며 내부의 은병과 금병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금, 은병은 몸통이 강조되고 구연부가 날카로운 전형적인 남북조시대형이며 보주 모양 손잡이 주변으로 여덟 장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 청동사리합 바깥 부분에 적힌 명문(銘文).

청동사리함 몸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정유년(577년) 2월 15일, 죽은 왕자를 위해 백제왕 창(昌·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절을 세웠다. 사리를 2매 넣고자 했는데, 부처님의 조화로 사리가 셋이 됐다”(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는 내용입니다.

이로서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걸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 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또한 왕흥사가 위덕왕의 선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절이라는 학계의 일반적 추론과 달리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든 절임도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 태자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뒀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 문화재청이 발굴 결과를 토대로 만든 백제 당시 왕흥사 모습 상상도. 강가에 배를 댈 수 있는 배다리를 갖췄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번 사리기가 발견된 왕흥사는 백제 사비성터에서 직선거리로 1km 정도 떨어졌으며 70m폭의 백마강을 건너면 바로 잇닿아 있는 왕사 중 하나입니다. 그 동안 왕흥사 터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아 현 발굴지의 위쪽에서 발굴을 진행하다가 아래쪽으로 옮겨오면서 비로소 확인됐습니다. 백제 최초 사리장엄구가 뒤늦게 발굴된 것은 목탑이 소실되면서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조사에서 새로운 목탑 심초부 조성 기법도 확인됐습니다. 심초석을 앉히기 전에 기단토를 조성한 뒤 되파기를 하여 중앙에 심초석을 놓고 그 위에 심주를 얹기 위해 80㎝×80㎝ 크기로 황색점토 및 사질토를 메워 다졌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심초에 심주를 바로 올리는 방식만 알려졌습니다. 또 심초석과 사리기를 분리한 중국식과 달리 심초석을 사리공으로 활용한 것은 백제만의 특이한 방식이며 이는 황룡사 목탑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고 국립고궁박물관 김연수 학예관(불교공예)은 말했습니다.

왕흥사터 목탑은 예전에 사라졌지만 발굴 결과, 가로 세로 14m에 이르던 장대한 탑이었습니다. 또한 왕흥사 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 추정 시설도 확인되었습니다.
- 백제 왕흥사 목탑터에서는 나온 금제 장식품(위쪽)과 형형색색의 구슬들(아래쪽). 사진출처: 조선일보

지진 같은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사리장치 주위에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는 각종 금 장식과 귀고리, 액막이(진묘수·鎭墓獸)형 장식, 구슬 등 진단구(鎭壇具·건물을 세울 때 액을 막기 위해 넣는 것)도 나왔습니다. 출토된 구슬은 낱개로 8000점이 넘습니다.

사리기는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가로 100㎝, 세로 110㎝) 밑에 별도로 깔린 사리 안치용 넙적돌에 뚫린 작은 구멍(사리공)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심초석에 사리공을 뚫은 뒤 기둥을 세우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라 백제시대 사리 봉안수법과 목탑 축조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 왕흥사 터 사리장엄구. 사진출처: 동아일보

위덕왕(재위 554~598)은 45년간 백제를 통치했지만, ‘가족사’는 불운했습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왕자 시절 고구려 장수를 베고 병사와 함께 침식했던 용감하고도 다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를 이끌던 자신을 위로하고자 출병했던 아버지 성왕이 매복한 신라군에게 살해되자 스님이 되려 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즉위(30세)했습니다. 53세 즈음에 아들이 죽는 아픔을 겪었던 그는 왕흥사 목탑 사리장엄구를 둬 아들의 영혼을 달래려고 했습니다. 위덕왕의 사후, 그의 아들들은 왕위를 잇지 못했습니다.

* 사리장엄구, 사리기=사리장엄구는 부처의 유골인 사리를 담는 사리기부터 함께 납입되는 각종 공양품에 이르기까지 사리에서 탑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의 것을 말합니다. 이중 사리기는 금.은.동.철.나무.돌 등 여러 재료로 만들고, 사리를 정성 들여 봉안하고자 안으로 갈수록 귀한 재질을 이용해 삼중.사중 등 여러 겹의 사리기에 사리를 안치하였습니다.

<왕흥사터에서 백제 황금사리병 등 '세상 밖으로'>


【대전=뉴시스】

577년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백마강변에 세운 왕흥사터 목탑지에서 황금사리병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됐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올해 시행한 부여 왕흥사지 제8차 발굴조사에 대한 발굴조사에 대한 자문위원회·현장학습의 날 행사를 갖고 출토 유물을 24일 공개했다.

이번 조사의 중요한 성과로는 최초로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확인됐다는 것과 더불어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577년)과 관련된 명문기록이 확인됐다.

그리고 사리기의 봉안수법과 목탑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이 확인되었고 사리구를 포함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의 다량의 진단구가 출토돼 당시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확인했다.

사리함(높이10.3㎝)은 장방형 심초석(100×110㎝) 남쪽 끝단에 16×12×16㎝의 크기로 마련된 사리공 내부에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 뚜껑에 덮여 봉안 돼 있었으며 재질은 청동으로 원통형 동체에 보주형 손잡이가 부착된 볼록한 뚜껑을 덮었다.

함 내부에는 다시 은제사리병(외병)을 봉안했고 이 은제 사리병 안에는 다시 금제사리병(내병)이 봉안, 실제 사리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았다.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로'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의 기록에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됐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 44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태자 이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명문 및 사리구의 구성내용을 통해서 절의 축조가 같은 위덕왕 대에 만들어진 능산리사지(567년)보다 10년 뒤에 조성됐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짐으로써 백제사 편년과 동시기 고고학적 자료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사회·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게 됐다.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변을 중심으로 다량 출토됐는데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을 비롯해 철도자,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년)에서 사용됐던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이 확인돼 백제시대 장신구연구 및 귀금속 제작, 대외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백제는 성왕대부터 중국에서 사리신앙의 영향을 받아 위덕왕대에는 일본에 사리와 함께 승려와 장인(匠人)을 파견하는 등 불교문화의 일본전파에 주된 역할을 했는데 이번 사리구와 진단구는 이러한 백제불교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리함이 봉안됐던 목탑지는 중층기단을 하고 있으며 하층기단을 기준으로 남북·동서길이 14m의 정방형 규모다.

중심부에 장방형 심초석(100×110㎝)이 안치돼 있는데 심초석을 안치하기 전에 기단토를 먼저 조성한 후 되파기를 해 그 중앙에 심초석을 안치했다.

심초석을 안치한 후 다시 심주를 얹기 위한 80×80㎝의 황색 점토 및 사질토로 판축된 토심적심으로 보이는 정방형시설을 마련했는데 유실로 인해 그 상부에 심주를 위한 별도의 초석을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 목탑지와 관련해서 기단, 특히 심초부의 조성수법은 그 동안 알려졌던 심초에 심주를 바로 올리는 수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백제시대 목탑 축조방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다.

이번 조사에서는 또 목탑지를 관통하는 절의 중심축선 상에 동서석축에 잇대어 남북방향으로 돌을 쌓아 축조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 금강 쪽으로 연결되며 현재 확인된 규모는 남북길이 62m, 동서너비 13m이다.

동서석축과 잇대어진 부분부터 남쪽으로 20m가량은 경사지게 내려가고 그 남편부터는 거의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어 어도(御道)로서 사찰로의 진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설과 연결되는 동서석축의 약 12m 구간에는 석축이 축조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 공간에 접안시설에서 경내로 들어가기 위한 문지나 계단지 등을 시설해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의 조사에서 석축은 경사구간에서 최대 10단(남북석축의 동측 부분)까지 확인되고 있으며 평탄한 구간에서는 4단 정도까지 확인됐다.

한편 동서석축은 총 95m내외의 길이로 높이 380㎝/16단 정도 남아있으며 계곡부에 사찰을 축성하는 것과 관련, 대지조성을 위한 축대로서의 기능과 강물유입을 막기 위한 제방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진단구 이외의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동서석축 전면부의 회색사질점토층과 황적갈색사질점토층에서 수습됐는데 와전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와전류는 백제시대 평기와가 대부분이나 통일신라시대 평기와 및 고려시대 평기와도 출토되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 기와는 목탑지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연화문수막새, 연목와 등이 다수 확인됐고 석축 전면부에서는 소조 광배로 보이는 토제품이 2점 출토되기도 했다.

박희송기자 hspark@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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